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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지만 읽고 있어요/읽어봅니다

게롤트와 시리 : 시리의 고민, 그리고 중립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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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쳐 소설 '엘프의 피'에서. 

 

신트라에서 탈출한 이후 지속적으로 PTSD에 시달리는 시리.

스코이아텔(다람쥐라 불리는 비인간 반란군)을 향한 분노.

신트라를 멸망시키고 자신을 뒤쫓는 닐프가드를 향한 아주 깊은 분노.

위쳐가 지키는 중립을 향한 강한 이의제기(당연히 이렇게 생각할만하다. 시리는 열심히 성장하는 중)

그리고 게롤트가 시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기억해두고 싶어서 번역해봤다.

오늘도 의역 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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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엘프들. 다람쥐들. 스코이아텔. 

게롤트가 비키라고 말하기 전, 시리는 요새에 있는 시체를 슬쩍 볼 수 있었다. 한 가지는 확실히 기억났다 - 그 남자의 얼굴은 핏물에 굳은 머리칼로 덮여있었고, 목은 이상하게 뒤틀리고 구부러져 있었다. 끔찍한 순간이 고정된듯한 찡그린 표정의 남자의 윗입술은 아주 하얗고 자그마한 비인간의 치아를 드러내고 있었다.  엘프의 부츠도 기억났다.  무릎까지 올라오는 높이에, 끈으로 묶는 낡은 부츠였고, 정교하게 세공된 버클이 부츠의 윗부분을 단단히 죄고 있었다. 

 

엘프들은 인간을 죽이고 자기들이 저지른 전투에서 죽는다.

게롤트는 그들 사이에 개입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야르펜은 그런 일에는 용서를 구할 필요 없다는 식으로 굴면 된다고 말한다......

 

시리는 생각에 잠겨 흙무더기를 발로 차며 모래 속으로 발꿈치를 쑤셔 넣었다. 

누가 누구를 용서하고 무엇을 용서해야 하는 걸까? 

다람쥐들은 인간을 죽인다. 그리고 닐프가드 제국은 그들을 시켜서 다른 사람을 죽인다. 다람쥐들을 이용한다. 선동한다.

닐프가드. 

 

시리는 신트라에서 일어난 일을 한 번도 잊은 적 없다. 잊으려고 노력했건만. 방황, 절망, 공포, 굶주림, 그리고 고통. 트랜스리버의 드루이드들을 따라 숲으로 들어갔을 때 찾아온 냉담과 무기력. 모든 것이 마치 안갯속에서 부옇게 드러나는 것처럼 떠올랐지만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기억은 어김없이 되돌아왔다. 상념 속으로, 꿈속으로. 신트라. 천둥같이 울리는 말굽소리와 무시무시한 비명소리, 시체들, 불길...... 날개 달린 헬멧을 쓴 검은 기사... 트랜스리버의 오두막들... 새카맣게 탄 잔해 속 검댕 가득한 굴뚝..... 잔해 옆 우물 위에서 옆구리에 입은 화상을 핥던 검은 고양이. 우물... 청소.... 양동이...

피로 가득 찬 양동이.

 

시리는 얼굴을 닦고 손을 바라보다가 깜짝 놀랐다. 손바닥이 젖어있었다.

 훌쩍이며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중립? 비개입? 시리는 크게 소리치고 싶었다. 위쳐는 냉정하게 지켜볼 뿐이라고? 아냐! 위쳐는 사람들을 보호해야 해. 레셴, 뱀파이어, 늑대인간으로부터 지켜야 한다고. 괴물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사악한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지켜야 해. 그리고 난 트랜스리버에서 악이 무엇인지 똑똑히 봤어.

 

위쳐는 약한 사람을 지키고 구해야 해. 남자들이 목매달리고 칼에 찔려 죽지 않도록 지켜야 해. 여자들이 땅에 꽂힌 말뚝에 박혀 죽지 않도록 지켜야 해. 아이들이 난자당해 우물에 던져지지 않도록 지켜야해. 불타는 마굿간에서 산채로 타죽기 직전인 고양이도 지켜야해. 이게 내가 위쳐가 되려는 이유이고, 이것이 내가 칼을 가진 이유야. 소든과 트랜스리버에 사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나처럼 칼을 가지지 않았고, 스텝, 반회전, 회피, 피루엣이 뭔지 모르거든. 아무도 그사람들에게 싸우는 법을 가르치지 않아서 늑대인간과 닐프가드의 약탈자들을 만났을 때 그들은 너무 무력하고 아무것도 못하잖아. 나는 싸우는 법을 배웠으니까 힘없는 사람들을 지킬 수 있어. 그것이 내가 할 일이야. 나는 중립을 지키지 않을 것이고 지켜보기만 하지 않을거야. 

절대로! 

 

 

(중략)

 

 

"아엘리렌" 긴 침묵 끝에 게롤트가 말했다. 

"아름답게 생겼어요" 게롤트의 손을 잡은 시리는 작게 속삭였다. 위쳐는 시리의 목소리를 못 들은 것 같았다. 그는 멀고 먼 다른 세계와 다른 시간대에서 온 조각상을 바라봤다. 

"아엘리렌은," 잠시 후 게롤트가 말했다. "드워프와 인간에게는 엘리레나라고 알려져 있지. 그녀는 200년 전 인간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어. 엘프 장로들은 전쟁을 반대했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 그러나 장로들은 전쟁에서 패배하면 엘프 종족은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이란 것도 잘 알고 있었어. 그들은 동족을 보호하고 싶었고, 살고 싶어했어. 엘프 지도자들은 도시를 스스로 파괴하고 인간들이 쉽게 올 수 없는 험한 산맥으로 숨어든다음... 기다리기로 했어. 시리, 엘프들은 아주 오래 살아. 우리 기준으로 보면 그들은 영원히 사는 것처럼 보여. 엘프들은 인간들이란 비오기 전의 가뭄처럼, 봄이 오기 전의 추운 겨울처럼, 추수철 전에 들이닥치는 메뚜기떼처럼 그저 한철 지나가는 존재로 생각했단다. 엘프 장로들은 그렇게 모든 문제로부터 빠져나가고 싶어 했어. 그래서 살아남는 것을 선택했지. 그들은 그들의 마을과 궁전, 그들의 긍지 샤에라웨드를 스스로 파괴했어. 그들은 그런 식으로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려고 했지만, 엘리레나는.... 엘리레나는 젊은 엘프들과 함께 인간에게 맞서 싸우는것을 선택했어. 젊은 엘프들은 무기를 들고 엘리레나의 뒤를 따라 그들의 마지막이 될 처절한 전투로 뛰어들었지. 그리고 학살당했어. 아주 무자비하게."

시리는 아무 말 없이 조각상의 고요한 얼굴을 바라봤다.

"그들은 엘리레나의 이름을 외치며 죽었어, " 위쳐는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엘리레나의 저항, 엘리레나의 함성을 함께하며 그들은 샤에라웨드를 위해 죽어갔어. 왜냐하면 샤에라웨드는 그들의 상징이었기 때문이야. 그들은 돌과 대리석.... 아엘리렌을 위해 목숨을 바쳤어. 그녀가 그들에게 약속한 대로, 그들은 영웅적으로 명예롭게 존엄을 지키며 쓰러졌지. 그런데 엘프 젊은이들은 그들의 명예를 지켰지만 폐허와 종족말살이라는 운명을 남아있는 자기 동족들에게 남기고 말았지.  야르펜이 한 말 기억하니? 세상에서 살아남는 자와 쓸려나가는자에 대한 얘기 말이야. 야르펜이 거칠게 말하긴 했지만 맞는 말을 했어. 엘프들은 수명이 길지만 젊은이들만이 새로운 자손을 낳을 수 있어. 그런데 그런 젊은이들이 모두 엘리레나를 따라나섰던 거야. 샤에라웨드의 하얀 장미 아엘리렌을.
우리가 서 있는 폐허는 그녀의 궁전이었던 곳이야. 아엘리엔은 저녁때마다 분수 옆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지. 그리고 이것... 이것들은 그녀의 꽃이란다."

 

시리는 아무 말이 없었다.
게롤트는 시리를 끌어당겨 어깨를 팔로 감싸 안았다.

" 스코이아텔이 왜 여기 있었는지 이제 알겠어? 그들이 뭘 찾고 싶어 하는지 알아보겠고? 엘프와 드워프의 젊은이들이 왜 다시는 학살되면 안 되는지 알겠니? 우리가 왜 이 학살극에 참여해서는 안 되는 지도 이해하겠어? 여기 핀 하얀 장미들은 일 년 내내 피어있어. 지금은 야생에서 자라게 내버려져 있지만 이 장미들은 잘 가꾼 정원에서 훨씬 아름답게 자라나. 엘프들은 샤에라웨드에 지금도 찾아오고 있어, 시리, 다양한 엘프 종족들이. 그들은 이런 영원히 피고 지는 꽃들을 상징으로 삼는 고매한 존재들이면서 쪼개진 돌덩어리들을 상징으로 삼는 성급하고 어리석은 존재들이기도 해. 그리고 모든 엘프들은 이 장미 덤불이 잡아 뽑히고 땅의 기운이 쇠하면 샤에라웨드의 장미는 두 번 다시 피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 내가 무슨 말하는지 알겠어?"   

 

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를 그렇게 휘젓는, 중립이라는 말이 뭔지 이제 이해하니? 중립을 지킨다는 것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관심없이 바라보는 것이 아니야. 네 안의 감정을 일부러 억누를 필요 없어. 마음속에 있는 증오를 없애는 것만으로 충분해. 알겠니?" 

"네, " 시리는 속삭였다. "이제 알겠어요, 게롤트. 나.. 이 장미 하나 가져가고 싶어요. 계속 기억하려고요. 그래도 돼요?"

"그렇게 해," 약간 주저하다가 위쳐가 말했다. "기억하는 것으로 하나 가져가. 이제 가자. 수송대로 돌아가야지." 

 

시리는 장미를 조끼의 앞섶에 꽂았다. 

 

(후략)